미국은 주택 자가보유율을 어떻게 높였나?

개인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임대보다는 자기 집에서 사는 것이 좋은 일이라면, 정부 부동산 정책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자가보유율을 높이는 것일 것이다. 게다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경제적 불평등이 매우 중요한 이슈인데, 자가보유율이 높아진다면 불평든 문제도 많이 완화될 것이다. 각자 보유한 집값은 차이가 나겠지만, 그래도 자기집이 있고 없고의 차이보다야 크겠는가?


미국의 자가보유율의 장기추세

실제로 국민의 주택 보유 증가를 정부의 가장 중요한 정책 어젠다로 삼아 상당히 성공을 거두기까지 한 나라가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끝내 파국적인 실패로 끝나버렸다. 바로 미국이다. 인도 중앙은행 총재였던 라구람 라잔 교수는 그 과정에 대해 폴트라인이라는 책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인류 역사상 길이 남을 대호황을 경험했다. 빈부격차도 크게 완화되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열심히 일해서 자기 집을 마련하고 경제적 안정을 이룰 수 있었던 시기였다. 1950년대의 미국은 높은 경제성장률, 낮은 빈부격차, 낙관적인 사회 분위기가 결합된 그야말로 풍요로운 제국이었다. 그 무렵 미국의 자가보유율은 40%대에서 60%대까지 급등했다. 그리고 이후 거의 30년 이상 64%선을 꾸준히 유지해왔다. 이처럼 자가보유율이 매우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는 것은, 미국 경제 시스템에서 국민의 부동산 보유에 관한 최적점을 찾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1990년 중반 이후 클린턴 행정부 때 변화가 생겼다.

미국은 1990년대 중반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동안 미국을 괴롭히던 쌍둥이 적자(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적자)가 거의 해결되고, 경제성장률이 4%대로 높게 유지되었으며, 실업률이 완전고용에 가까울 정도로 낮아지는 등, 미국 경제는 신경제의 초입에 들어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다수 미국인들은 이러한 화려한 경제적 성과의 과실을 향유할 수 없었다. 바로 부의 집중화 현상 때문이었다. 실질임금의 증가는 상위 5% 이상에 집중되었다. 최상류층은 주가 상승 등으로 자산소득이 크게 증가하여 과거보다 훨씬 많은 부를 챙길 수 있었지만, 중산층 이하의 계층은 경제성장과 과실로부터 계속 소외되었다. 당연히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정치권은 이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했다.


빈부격차가 심해진 미국의 정치적 선택

1990년대 이후 미국의 빈부격차가 그처럼 급격하게 심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

미국의 최고소득세율은 한때 90%까지 육박했지만, 레이건 정부 이후로 28%까지 급격히 인하되었다. 기업은 기술발전에 따라 소수의 고급 노동력을 필요로 했으며 이에 따라 저숙련 노동자의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또한 레이건 정부 이후 진행된 반노조 정책 때문에 노동자 계급의 임금 협상력이 크게 떨어졌다. 아울러 과거 대공황 시절의 반경쟁정책으로 임금상승이 억제되었는데, 갑자기 규제가 완화되면서 소수 노동자들의 임금이 크게 상승했다.

이밖에도 여러 원인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여러 학설 중에서 가장 큰 지지를 얻는 것은 역시 숙련편향적 기술 진보설이다. 고급 교육을 받은 소수의 고급 노동자들만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사회로 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 주장이 맞다면, 미국 정부는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교육수준을 높였어야 했다. 또한 만약 너무 낮은 소득세율이 문제라면 소득세를 올려야 했고, 반노조 정책이 문제라면 노조친화적 정책으로 바꾸어야 했으며, 갑작스러운 규제완화가 문제라면 정부 규제를 좀 더 합리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들은 각기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교육 체계를 바꾸는 개혁은 정당마다 개혁 방향에 대한 의견이 달랐고, 개혁의 효과가 언제 나타날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소득세 인상 정책은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미국은 국민의 71%가 빈곤층도 얼마든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이다. 그래서인지 부자에게만 증세를 하더라도 중산층들까지 자신들에 대한 증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기에, 소득세 인상 정책을 시행하는 데에는 정치적 부담이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4년마다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한다. 그래서 국민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데 효과가 빠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저항이 적은 대책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도입된 것이 바로 대출 확대 정책이었다.

오너십 소사이어티

대출 확대 정책은 빈곤층이 적은 소득 때문에 불만이 많다면, 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도록 해주면 되지 않느냐는 매우 단순한 대책이었다.

대출로 집을 사게 되면 부유층처럼 부동산 가격 상승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대출은 갚아야 하지만 그것은 미래의 일이다. 미국 정치권은 대출 확대 정책을 환영했고, 이 정책은 국민들에게 즉각적인 효력을 발휘했다.

1995년 클린턴 대통령은 국민 주택 보유 증대 전략과 관련한 보고서 서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해 나는 관련 장관들에게 이번 세기가 끝날 즈음, 미국 역사상 주택보유율이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계획을 개발해달라고 요청했다. 주택보유율이 늘어나면 미국 가정과 공동체의 힘이 커질 것이고, 미국 경제의 힘도 강화될 것이며, 미국의 위대한 중산층도 따라서 증가할 것이다. 미국 근로계층의 가정이 주택 보유에 대한 꿈을 다시금 불태우도록 만드는 정책을 통해, 우리는 21세기에 미국을 훨씬 더 부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의 이러한 정책기조는 의회에서도 환영을 받았다. 이에 클린턴 행정부는 주택금융을 중심으로 가계대출을 확대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폈다. 이후 공화당의 부시 정부는 클린턴 정부의 거의 모든 정책을 부정하는 ABC(anything but clinton)정책을 시행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주택금융 확대 정책만큼은 충실하게 받아들였다. 부시 행정부는 2기 집권 때부터 아예 정권의 핵심 슬로건으로 오너십 소사이어티라는 문구를 내걸고 이를 추진했다.

오너십 소사이어티 어젠다는 부시 정부의 핵심 경제공약이었기에 그 내용도 매우 방대했다.

20049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발표된 주요 내용을 보면 첫째, 소비·저축·투자에 관한 개인퇴직연금 계정 및 의료저축 계정의 확대, 셋째, 감세의 영구화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부시 정부는 부동산의 자가소유를 늘리기 위해 모기지(주택담보대출)이자에 대해 세액공제를 해주고, 연방정부의 주택 관련 예산 집행을 주정부에 좀 더 위임하고 토지 관련 규제를 완화했다. 조지 부시는 2004617일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민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소유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미국 미래의 중요한 한 부분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국민의 주택 보유가 더 늘어나면 경제의 활기도 더 커질 것이고, 더 많은 국민이 미국 미래의 중요한 부분을 함께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의 이 연설은 10년 전 클린턴 대통령의 보고서 서문과 거의 비슷한 내용이지만, 주택보유율 증대 전략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연설 이후 가계대출 확대 정책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이에 따라 미국 부동산 시장은 활활 타올랐다. 1995년 무렵부터 2006년까지 미국 정부는 국민들의 주택보유율을 높이겠다는 목표 아래 초당적으로 꾸준히 협력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 정부는 10년에 걸쳐 주택보유율 상승 정책을 폈고, 결론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의 주택보유율은 1960년대부터 1995년 무렵까지 거의 35년 동안 약65%를 유지해왔는데 이후 10년 동안을 거치며 69%까지 상승했다. 이 정책으로 미국 가정의 4%가 추가적으로 자기 집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무려 30년 이상 꼼짝도 하지 않았던 주택보유율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부시 대통령의 연설 이후 3년 만에 미국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와 이에 따른 대량실업 사태를 겪어야 했다. 미국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2015년 현재 주택보유율은 63.7% 수준으로 복귀해버렸다. 결과적으로 클린턴과 부시 대통령의 장담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진행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주택보유율 상승 정책의 위험

한 국가가 주택보유율을 높이려면 두 가지 방법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가계소득의 확대와 주택가격의 안정이다. 주택가격이 안정적인데 가계소득이 증가하면 집을 사려는 사람이 늘게 마련이다. 이것은 가장 기본이자 정석이라고 할 만한 방법이다. 하지만 문제도 있다. 가계소득을 늘리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사실 소득이 늘어 나기만 한다면야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래서 미국은 두 번째 방법이 필요했다.

둘째, 미국 정부가 실천한 바와 같은 대출 확대 전략이다. 주택은 비싼 상품이므로 구입 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융의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대출 확대 정책을 펴면 효과가 즉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 쉽고 빠른 방법에는 대가가 따른다. 바로 주택가격의 상승이다.

미국의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실질 주택가격은 1995년부터 2005년까지 80% 상승했다. 주택가격이 이처럼 크게 상승하자, 주택 구입을 위한 대출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하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과유불급이다.

은행들은 처음에는 신중하게 우량고객의 대출을 늘렸다. 이것이 바로 프라임 대출이다. 그런데 상환 능력이 충분한 사람들이 어지간히 대출을 받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은행에는 돈이 넘쳐났다. 정부의 보증은 확실했고, 온갖 신기한 금융기법들이 속속 등장하면서부터 은행들은 점점 과감해졌다. 그래서 비우량 고객들에 대한 대출까지 점차 늘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서브프라임 대출이다.

실제로 미국 시카고 지역의 대출을 실증적으로 연구한 결과를 살펴보면, 2002~05년 저소득층 밀집 지역의 대출 증가 속도가 고소득층 지역보다 2배나 높았다. 특히 유의할 점은 저소득층 지역의 가계소득이 감소하는 와중에도 이처럼 대출이 크게 증가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금융기관들이 대출자의 소득에 따라 대출액을 결정했는데, 평소의 보수적인 행태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2006년 말 잔액 기준으로 빈곤층에 대한 대출은 약12천억 달러에 달했다. 다른 저신용 대출인 홈 에쿼티 론 까지 합치면 24천억 달러로 추정되기도 한다. 경제규모가 세계 11위인 한국의 2016년 연간 G에 가 약 14천억 달러이니, 거의 한국의 1GDP 에 해당하는 엄청난 대출이 미국 저소득층에게 뿌려진 것이다.

당시 미국의 모기지 대출 잔액은 총 10조 달러였으며, 빈곤층에 대한 대출은 약 12천억 달러였다. 즉 빈곤층 대출은 미국 주택담보대출 전체의 약 12%였고, 2006년 말 기준 미국 가계 순자산인 56조 달러의 고작 2.1%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부채가 전부 부도가 난 것도 아니다. 2006년 최고조에 달했을 때, 서브프라임 채무의 연체율은 약13%였다. 미국 전체로 보면 약 1500억 달러 정도의 부채가 연체 상태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첨단 금융기법으로 엄청나게 복잡해진 금융 시장에 큰 충격을 주었고, 금융기관들은 패닉에 빠져버렸다. 리먼 브라더스를 비롯한 수많은 금융기관들이 파산했고, 1929년 대공황 이후 최대 규모의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이후 주식과 부동산 시장의 대폭락으로 약10조 달러 이상의 자산이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정리하면, 미국 경제는 건실하게 잘 성장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 성과는 소수의 부유층에게만 집중되었고, 이에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정치권이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더 많은 대출을 제공하여 주택보유율을 높이는 정책을 실시했고, 10년 만에 주택보유율을 4%나 높이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이루기 위해서 저신용자를 대상으로 한 서브프라임 대출이 12천억 달러가량 공급되었고, 이는 미국 가계 순자산의 2%에 불과했지만 금융 시장의 핵심적인 상품으로 커졌다. 그리고 이 중 약 13%가 연체되었고, 이를 계기로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결국 200만 호 이상의 주택이 압류되었다.

이것을 한 문장으로 더 요약한다면, ‘미국 가계 중에서 4%가 주택을 더 보유할 수 있게 하려다가, 미국과 세계 경제를 망하게 할 뻔하고 주택200만 채를 압류로 날려버린 사건이다.


한국은 자가보유율 유혹에서 자유로운가?

뉴타운 열풍이 남긴 상처

2000년대 중반 한국에서 뉴타운은 마법의 단어였다. 훨씬 쾌적한 집을 공짜로 얻을 수 있고, 거기에다 엄청난 돈까지 벌 수 있다는 환상이 대한민국을 흔들었다.

뉴타운이란 정확하게 말하자면 도시재정비 촉진을 위한 특별법에 따른 재정비 촉진사업이다. 원래 도시의 주거공간을 재정비하는 방법은 재건축, 재개발, 주거환경 개선, 도시환경정비 등 네 가지로 나뉜다. 뉴타운은 이 네 가지 방법을 모두 포괄하여 대단위로 개발하려는 방식이다. , 도시에서 재개발이나 재건축이 소규모로 군데군데에서 진행되면 마구잡이 개발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크게 묶어 좀더 계획적으로 개발하자는 취지였다.

뉴타운 정책은 물론 취지 자체로만 보면 훌륭하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계획이었고, 결국 엄청난 부작용을 낳고 사그라들었다. 뉴타운 열풍이 꺼진 지 거의 1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당시의 흉터가 서울 곳곳에 남아 있다.

뉴타운 사업의 실패 이유

뉴타운 사업이 대실패로 끝난 이유는 사실 너무 단순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뉴타운 사업지구가 한꺼번에 너무 많이 지정되어 시장이 도저히 이를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73~2002년의 30년 동안 서울 지역에서 주택 재정비사업이 완료된 면적은 총 1010였다. 그런데 2002~06년의 단 5년 동안 뉴타운 사업지구로 지정된 면적이 무려 2380에 달했다. 즉 지난 30년동안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모든 재정비사업 면적보다 2.5배나 넓은 지역이 뉴타운 지구로 선정된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이 사업의 문제점과 실효성에 의심을 가져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 뻔한 숫자가 뉴타운의 태풍이 한참 몰아칠때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2002년 길음과 은평, 왕십리가 뉴타운 시범사업지구로 정해졌고, 2003년 한남·노량진 등 12개 지구가 2차 뉴타운 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2005년에는 장위·수색등이 3차 뉴타운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초기에 뉴타운 지구가 선정되었을 때는 즉시 가격이 요동을 쳤다. 은평구와 성북구 등 초기 뉴타운 지구의 아파트 가격은 1년 만에 20% 가까이 급등했다. 강북에 집중되어 선정된 뉴타운 지구 덕분에 이제 강남만큼 발전할 수 있겠다는 희망에 부푼 시민들은 2006년 선거에서 뉴타운 지구를 50개로 늘리겟다는 오세훈 시장을 뽑았다.

그리고 오세훈 시장은 당선된 이후 뉴타운 위험성에 대해 걱정하며 슬금슬금 발을 빼는 모습을 보였다. 공약과는 달리 추가 뉴타운을 10개 이하로 최소화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2008년 총선에서 뉴타운 바람이 다시 불붙었다. 서울의 48개구 중 29곳에서 뉴타운 공약이 나왔고, 여당은 서울에서만 40곳에서 승리했다. 한마디로 뉴타운 선거라고 불릴 만한 선거였다. 하지만 오세훈 서울시장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추가 뉴타운 지정은 절대 없다.”며 못을 박았고, 실제로도 추가 지정은 없었다. 한마디로 뉴타운을 둘러싼 거대한 정치 사기극이 벌어진 것이다.

사업 중단, 그후

그 결과는 참혹하다. 전체 뉴타운 구역의 25%가 시작도 하지 못하고 해제되었다. 그러나 그냥 사업이 중단되는 것으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서울시가 2013년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해제된 지역의 건물 중 75%1,2층 단독주택이고, 이 중에서 30년 이상 경과된 노후·불량 건축물의 비율이 83%에 달했다. 달리 말해 지역이 슬럼화되었다는 뜻이다. 재정비가 필요한 지역이나 원래 낡은 주택들이 모인 곳인데, 10여 년 동안 개발 예정지라는 이유로 주택을 거의 유지·보수하지 않았으므로 노후화가 더욱 가속화된 것이다.

게다가 뉴타운 해제지구는 65세 이상 고령인구의 비중이 평균 15%에서 최대 23%로 서울시 평균에 비해서 높고, 세입자 비율이 무려 70%까지 된다. 뉴타운 사업이 실제로 가장 필요한 지역들이 가장 큰 상처를 남기고 해제되어버린 것이다. 가난한 지역이다 보니 뉴타운 사업비를 확보할 방법도 없었고, 더욱 가난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재 진행중인 곳은 괜찮은가?

그렇다면 현재 사업이 진행중인 곳은 괜찮을까? 그것도 아니다. 현재 뉴타운 사업 구역 중 완료된 곳은 전체 지정 구역의 15%40개 구역밖에 없다. 남은 157개 구역 중에서 단 15곳에서만 공사가 착공되었고, 사업 추진 주체가 없이 구역 지정만 된 구역이 22, 조합 설립 전단계인 추진위가 구성된 구역이 27곳이고, 조합이 설립된 구역이 28, 사업시행인가를 받은 구역은 36, 관리처분계획인가를 받은 구역은 19곳 등 대부분의 지역에서 진행이 지지부진하다. 이 와중에 주민들의 반목은 더욱 심해지고 각종 소송이 난무하고 있다. 오랜 시간 함께해왔던 지역공동체가 뉴타운을 둘러싸고 대대적으로 해체되어버리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또한 사업이 성공적으로 완료된 곳이라 해도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뉴타운은 소형주택을 밀어내고 중대형 아파트를 공급하는 방식이다 보니, 주택 공급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택수가 줄어드는 결과가 생기기도 했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이 사업을 통해 총 136,346호의 주택이 철거되고 67,134호의 주택이 신축될 예정이라고 한다. 새로 지어지는 주택은 쾌적하겠지만 그만큼 비싸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두 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원래 이곳에 살던 원주민이라 할 수 있는 서민층이 대부분 밀려나게 된 것이다. 길음 4구역의 경우 재개발 후 약 15.4%만이 해당지역에 정착을 했으며, 나머지 84.6%의 원주민들은 정을 붙이며 살아온 동네를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만 한다.

이처럼 신중하지 못했던 뉴타운 공약을 통해 정치는 정치대로 왜곡되고, 부동산 시장은 부동산 시장대로 망가져버렸다. 그나마 미국처럼 거대한 금융위기로 발전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자위해야 할까? 뉴타운이 거대한 실패로 끝났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부동산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필수재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드라마틱한 수익률을 보여줄 수 있는 투자 자산이기도 하다. 어떤 정치권력이든 부동산을 자기의 수단으로 쓰고 싶은 욕망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대한민국 부동산은 대폭락하지 않았다. 강남, 서초, 송파, 목동, 분당, 용인, 평촌 등 이른바 버블 세븐을 위시로한 일부 지역의 아파트 가격이 한동안 상당히 하락한 일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대한민국 부동산 가격은 폭락하지 않았다. 폭락은커녕 일부 지역의 경우 오히려 대폭 상승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니, 정말 폭락이 없었다고 ? 못 믿겠다고 ?

머리말에서 말했듯, 우리가 흔히 주고받는 부동산 이야기에는 사실 수많은 억측과 오해가 교차하기도 하고, 불합리한 가정이 전제되기도 하며, 무엇보다 주술적 예언이 전망이라는 탈을 쓰고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자칫 우리 스스로에게 대한민국의 경제 흐름을 잘못 읽게 하고, 때로는 잘못된 판단을 불러일으키며, 그로 인해 손해를 보게 하기도 한다.

사실 부동산 시장에 대한 판단만큼 개인, 또는 한 가정의 자산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또 있겠는가? 그러나 경제는 도덕이나 종교가 아니다. 그러니 이제 좀더 냉정하게, 대한민국의 부동산이 정말 폭락하지 않았는지 찬찬히 살펴보자.

다음은 한국감정원에서 발표하는 아파트 매매 가격 동향을 연간 단위로 표시한 것이다. 전국, 수도권, 서울의 세 가지 기준으로 그래프를 그려봐도, 2007년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주택가격 하락의 흐름을 확인하기란 쉽지가 않다. 오히려 연간 기준으로 전년 대비 전국 아파트 가격이 하락한 해는 2013년이 유일하다. 아파트 가격을 기준으로 보면 2007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우리나라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제공하는 글로벌 부동산 가격지수를 보아도, 대한민국의 부동산 가격은 매우 안정적인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 부동산 시장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급락했다가 점차 회복되어가는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비해, 한국은 큰 등락 없이 꾸준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30%가까운 하락을 경험한 미국이나 유럽의 사정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물론 아직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여진은 이어지고 있다. 세계는 여전히 경기부진과 고실업에 시달리고 있으며, 상당수의 국가가 엄청나게 불어난 국가부채로 고통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대폭락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다.

앞으로의 일을 누가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겠는가? 미래에 닥칠 상황을 예언하는 것은 아무리 전문가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일단 질문의 방향을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에 대한 것으로 바꿔보자.

왜 대폭락은 오지 않았는가?”

나는 이 질문이 현재 시점에서 대한민국 부동산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핵심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지난 수년 동안 이어져온 부동산 담론에 담겨 있는 수많은 오해와 억측을 드러내고, 대한민국 부동산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당시 다른 선진국이 겪어야 했던 대폭락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 원인으로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이제 그점을 살펴보자.

한국은 대폭등이 없었다.

산봉우리가 높아야 골짜기도 깊을 것이다. 역사상 대부분의 부동산 폭락 사태는 직전의 대폭등 이후에 벌어졌다. 가장 최근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의 폭락도 그렇고, 그보다 먼저 일어난 1990년 일본 부동산의 버블 붕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에 비해 한국은 2000년대 이후로 대폭등이라고 할 만한 상승이 없었다.


주택가격 상승률, OECD 평균의 절반

지난 참여정부 시절(2002~07) 허구헌날 부동산이 폭등하고 있다며 이어지던 그 수많은 기사들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대한민국 부동산은 꾸준히 가격이 오르기는 했지만, 경제학적으로 대폭등이라고 할 만한 상승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모든 언론이 입을 모아 그렇게 성토했던 부동산 가격은 사실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매우 안정적인 흐름을 이어갔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어떤 기준으로 들여다보더라도 명확하다.

다음은 2000년부터 2006년까지의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OECD 주요 국가의 실질 주택가격 상승률을 보여주는 그래프이다.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유동성이 흘러 넘치면서 글로벌 부동산 경기가 대호황을 경험했던 시기이다.

그 무렴 OECD 국가의 평균 실질 주택가격 상승률은 무려 42%를 기록했으며, 특히 버블이 심각했던 스페인은 심지어 90%가 넘는 실질 상승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실질 주태가격 상승률은 OECD 평균의 절반에 불과한 21%였다.

앞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 한국보다 부동산 가격 상승률이 낮았던 국가는 일본이나 독일 정도가 전부였다. 일본과 독일의 부동산 가격이 안정적이었던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두 나라는 심각한 불경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알다시피 1990년 부동산 버블 붕괴 이후로(약간의 변동은 있었지만) 꾸준히 침체를 기록하고 있었다. 독일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동서독 통일의 후유증으로 경기침체가 이어지고 있었고, 당시는 유럽의 병자라는 이야기까지 듣고 있던 시기였다. 독일이 부흥하게 된 것은 2002년부터 시작된 노동 시장 개혁 프로그램인 하르츠 개혁의 효과가 발생하기 시작한 2005년 이후의 일이다. 이전가지 독일은 경제성장률이 3%미만, 실업률이 10%대에 육박하는 불경기를 오랫동안 거쳐오고 있었다.

한국 부동산, 왜 폭등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한국은 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지 않았을까? 한국도 독일이나 일본처럼 불경기였기 때문일까?

아니다.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은 어떤 경제지표를 들이대더라도 훌륭했다고 평가받을 수준이었다. 카드사태가 있었던 2003년을 제외하고, 2002~05년 동안 매년 경제성장률은 4~5%를 기록했고,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었으며, 조선업은 세계1위를 굳히고 있었다.

한국의 1인당 GDP200211,257달러에서 2007년에는 23,103달러를 기록했다. 5년 만에 1인당 국민소득이 2배나 넘게 올랐던 것이다. 이만한 오황이 어디 있었겠는가?

2000년대 초중반의 한국 경제는 이처럼 1980년대 후반 일본의 버블기와 매우 닮아 있었다. 이 시기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세 가지 면에서 유사점을 보인다.

첫째, 대규모 경상주시 흑자를 통해 국내로 돈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이 시기 일본과 한국은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가 연평균 2%대에 이르렀다.

둘째, 경제성장률이 4~5%대를 기록하면서 충분히 높았고 실업률도 완전고용에 가까웠다. 특히 일본은 버블 시기에 2%대의 기록적으로 낮은 실업률을 기록하던 참이었다. 한마디로 최고의 호황기였다.

셋째, 양국의 금리는 모두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일본은 부동산 버블이 한창이던 1987~892.5%대의 낮은 기준금리를 유지했고, 이는 버블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경기 호황기에는 보통 물가도 크게 뛰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일 양국은 두 시기에 물가상승률이 매우 낮았다. 이렇게 물가에 대한 부담이 없다면 금리도 낮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2000년대 초중반의 한국도 금리는 꾸준히 낮아지는 추세였다. 200254.25%를 기록했던 기준금리는 2004113.5%대까지 낮아졌다.

이 세 가지 조건은 모두 시장에 돈이 흘러 넘치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일단 무역을 통해서 외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오면 외화 소득이 늘어나게 되고,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실업률이 낮아지면 임금이 오르고 가계소득이 늘어나며 시중에 돈이 많아지게 된다. 여기에 금리까지 낮았으니 사람들이 돈을 쉽게 빌리게 되고, 시장에는 돈이 흘러 넘치게 된다.

이렇게 돈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물건을 사게 마련이고, 큰돈이 많아지면 비싼 물건을 사게 될 것이다. 결국 시장의 돈과 투자심리가 자연스레 부동산 시장으로 몰리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시 한일 양국은 시장에 돈이 많아질 요건을 갖추었다. 하지만 일본은 망국적인 부동산 버블과 폭락을 겪었고, 우리는 OECD 주요국 중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부동산 가격을 관리한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면 유럽과 미국의 부동산이 그렇게 폭등, 또는 폭락하던 바로 그시기에 한국은 어떻게 부동산 폭등과 폭락을 피할 수 있었을까? 이제 이 부분을 좀 더 들여다보자.

공급 확대 정책

당시 언론은 부동산 가격을 잡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공급 확대인데, 정부가 이를 도외시하고 수요 억제 정책에만 열을 올린다는 식의 비판을 많이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급 확대 정책도 함께 꾸준히 추진되었고, 이에 토건족 정부라는 식의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어쨌든 정부는 수도권 일대에 공공택지를 꾸준히 공급하며 국민임대주택을 지어서 보급했고, 저소득층이나 생애 최초 주택 구매자에 대한 금융지원을 늘려나갔다.

역대 정부의 주택공급량을 비교해보면,김영삼 정부는 5년간 연평균 62만 호, 김대중 정부는 연평균 45만 호, 참여정부는 53만 호, 이명박 정부는 45만 호를 기록했다. 물론 이런 주택공급량이 적절했는지는 시장의 상황과 국민주택보급률 등 여러 변수를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절대량으로 보아 당시의 주택공급이 모자랐다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거래 투명화 정책

참여정부는 부동산 폭등을 막기 위해 적극적인 거래 투명화 정책을 폈다. 당시에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지만, 장기적으로 시장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책이었다. 부동산 거래가 차명거래 등으로 왜곡되지 않아야 시장이 공정하게 운영될 수 있고, 정부의 세금정책도 제대로 실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래 투명화를 위한 조치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20058.31 부동산 대책에 포함된 것으로 실거래가 신고를 의무화하고 이를 등기부에 기재하게 한 것이다. 9.31. 대책은 종부세나 양도세 강화 등 세금문제에서 주목을 많이 받았지만, 부동산 전문가들은 오히려 이 실거래가 의무화 조치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기도 했다. 그만큼 장기적으로 시장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당시 참여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집대성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20058.31 대책의 내용을 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부동산 가격 안정과 시장 기능 회복을 위해 정부가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느낄수 있을 것이다.

정부정책을 보는 눈

정부정책에 올라타라

제가 아마 과거 조선시대의 호조판서를 포함해서, 역대 재무 책임자중 돈을 가장 많이 써본 사람일 것입니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했던 발언이다. 안 그래도 환율정책이나 대운하 사업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던 강만수 장관은 이 발언으로 그야말로 쏟아지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는 부적절한 발언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도 그렇게 부적절한 발언이었을까? 경제 운영을 책임지고 있던 장관의 개인적인 소회라면 그렇게까지 비난받을 만한 발언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나도 그때에는 거칠게 비난한 바 있었음을 고백해둔다. 하지만 당시의 위급한 경제 상황에서는 정말 원 없이 돈을 써서라도경기를 떠받쳐야 할 정부의 역할이 필요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때 상황을 다시 떠올려보자. 2008914일 세계 5대 투자은행중 하나였던 리먼 브라더스가 결국 파산했고, 이후 세계 금융 시장은 공황상태로 빠져들었다. 다우지스는 12,000선 수준에서 20091월에는 7,000선까지 급락해 거의 반 토막이 났고, 세계 경기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위기는 한국에도 그대로 이어져 외국인자금이 대거 이탈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해외발 공황의 모습이 진행되던 때였다. 게다가 이런저런 정책 실패가 이어졌다. 키코(KIKO)사태로 인해 멀쩡한 중소기업들이 외환관리 실패로 무너져 내렸고, 정부의 경솔한 외환시장 개입 발언으로 달러화 매도 사태가 벌어졌으며,이를 막기 위해 외환보유고를 헐어서 도시락 폭탄이라는 이름으로 외환시장에 강하게 개입했다. 이 와중에도 경제위기는 이어졌고, 어쨌건 정부는 상황을 수습해야만 하는 책임이 있었다.

경제성장률의 추이를 보면 그 무렵의 경제 상황을 단적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20084분기부터는 전년 동기 대비 마이너스 성장률로 떨어졌고, 20092분기까지 3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이 정도의 경기침체는 경제성장률이 -5%수준으로 떨어지던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서는 매우 양호한 수준이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경제적 고통이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경제성장률이 이런 수준이니 다른 경제지표들도 엉망진창이었다. 특히 설비투자 감소분은 매우 심각해서 20084분기와 20091분기에는 전분기 대비 각각 -8.4%-9.6%를 기록했다. 2분기 연속으로 마이너스 10%대의 감소율이라면, 2분기 만에 기업투자가 20%나 줄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정책은 크게 두 가지다. 통화정책으로 기준금리를 인하하거나 재정정책으로 적자 재정정책을 펴는 것이다. 이것도 상황의 심각성에 비추어본다면 매우 강력하게 추진되어야만 했다. 정부는 이런 위기를 충분히 넘길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시장에 보여주어야 했고, 실제로 돈을 풀어 경기를 자극해야만 했다. 한국이 어떤 경제정책을 폈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정부정책의 시그널

첫째, 한국은행은 과감한 통화정책을 시행했다. 20089월에는 기준금리가 5.25%였는데, 20092월까지 2%로 급속도로 인하했다. 이러한 통화 확장정책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서 20176월 현재 1.25%대를 유지하는 중이다.

물론 이런 통화정책은 전 세계적으로 거의 모든 나라가 시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도 이런 추세에 발맞추어 교과서적으로 확장적 통화정책을 강력히 시행한 점은 분명 평가받을 만하다.

둘째, 한국 정부는 강만수 장관의 발언처럼 원 없이 돈을 푸는 적자재정 정책을 펼쳤다. 당장 사고가 터졌던 20084분기 4.6조원의 추경예산을 편성했고, 2009년 적자 재정정책을 펴며 상반기에 재정을 집중적으로 투입했으며, 하반기에는 역대 최고의 추경예산(28.4조원)을 편성하여 적자 재정정책의 효과를 증대시켜나갔다.

물론 이러한 과감한 적자 재정정책은 대운하 사업 등에 대한 국민적비판과 맞물려 인기가 없었다. 또한 부동산 가격 상승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던 시점에서 정부가 이렇게 건설토목사업에 재정을 집중하는 것은 또다시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는 인위적 경기부양책이라는 비판도 거셌다.

하지만 국가 경제 전체가 금융위기의 후폭풍에 휘말려서 꺼져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아울러 부동산 시장도 언제든 가격 급락의 위험성이 남아 있던 시점이었다. 다시 말해 인위적 경기부양이 가능하다면 그것을 했어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정부정책의 양면성

결국 한국은 중국과 더불어 2008년 금융위기를 가장 성공적으로 탈출한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중국이 엄청난 경기부양책을 시행하며 각종 중간재 소비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한국의 수출도 증가했다. 또한 기업은 자동차와 휴대폰으로 대표되는 뛰어난 상품 경쟁력으로 불황기를 오히려 기회로 전환시킨 전략이 성공했다. 그리고 세계 각국이 극심한 경제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조한 것이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 정부의 과감한 재정정책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정부는 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에 연간 GDP4%이상의 재정을 추가로 집행했다. 이러한 적자 재정정책은 경제위기에 대한 교과서적인 처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당시 한국 정부의 경제정책을 적자 재정정책을 썼으니 잘했다라는 식으로 긍정적으로만 평가하고 말아서는 안 된다.

20세기 초반 케인스가 말한 것처럼, 적자 재정정책은 그냥 땅만 파는 것이라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식으로 거칠게 접근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만일 재정을 1억원을 투자한다면 어느 정도의 경기부양 효과가 밠갱하는가 하는 승수 효과를 따져보아야 한다. 이왕이면 재정투자분보다 효과가 큰 것이 훨씬 더 좋은 정책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대운하 사업을 비롯하여 타당성이 검증되지 않은 온갖 국책사업들이 재정정책이라는 탈을 쓰고 시행되었다. 사실 이과정에서 엄청난 돈이 풀린 사업들은 흥청망청하는 분위기마저 있었다. 과거 세계적으로도 매우 건전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대한민국의 재정은 이제 적자구조로 정책되고 있으며, 국가부채가 우려스러울 정도로 급격히 늘어났다.

당시의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급박하게 진행된느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경기를 부양해야 했고, 이를 위해 정부는 과감하게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써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반면 이 과정에서 국론의 분열로 인해 국가적 통합이 크게 저하되었고, 비용 대비 측면에서는 효과가 의문스럽다. 게다가 정부 지출이 효과가 별로 없는 분야에 투입되는 부작용도 함께 낳았다.


정부의 부동산 부양책

정리해보자.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미국과 유럽의 여러 선진국들이 모두 부동산 폭락 사태를 맞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각국 정부는 재정 여력을 완전히 소진해버렸고, 민간의 소비는 위축되었으며, 기업의 고용이 얼어붙으면서 실업률이 치솟았다. 물론 우리 경제에도 위태로운 상황이 많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아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완만한 굴곡으로 위기를 넘겨왔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부동산 대폭락에 대한 경고를 계속해서 접하게 되었고, 그러한 경고는 지금도 여전히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질문하게 된다. 지금까지 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가장 쉽게 답하자면 정부가 인위적으로 부동산 경기를 떠받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대답에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도로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인위적으로 부동산 시장을 떠받치지 않은 국가가 어디에 있느냐?”고 말이다.


부동산이 대폭락하지 않은 세 가지 이유

부동산 시장이 대폭락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일반의 믿음과는 달리 한국은 부동산 대폭등의 시기가 없었다. 실질 주택가격 상승률이 OECD평균 상승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를 대폭등이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6년간 전국 평균 주택가격이 20%남짓 올랐다고 이를 폭등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둘째, 부동산 시장의 정상화를 위해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부동산이 대폭등했는데, 세계화된 시대에 우리만 이를 피할수 있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반대론자들의 조롱을 참으면서 꾸준히 일해온 참여정부의 공일 것이다.

셋째, 위기 상황이 벌어진 시점에서 과감한 통화정책과 적자재정 정책을 폈다. 물론 그 조치들이 정치적으로 악용된 면이 있었고,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한 점도 있었다. 이는 분명 비판되어야 할 지점이겠으나, 경제위기 상황에서 필요한 조치였다는 것은 사후적으로 충분히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일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1980년의 후반의 일본뿐만 아니라 2000년대 초반 세계 부동산 대호황기에 각국 정부는 제대로 된 부동산 가격 안정책을 내놓지 못했다. 오히려 자산가격의 상승으로 인한 소비 증가 효과를 충분히 즐기고 싶어 했다. 가장 대표적인 국가가 미국이다.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은 20028월 캔자스시티의 FRB심포지엄의 개회사에서 시장의 우려에 대해자산가격 붐을 방지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붐이 붕괴할 때 후유증을 완화하고 다음 확장기로 쉽게 전환할 수 있도록 할 수는 있다.”라고 말했다. 쉽게 말하면 자산가격 상승을 방치하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를 맞게 된다.

1990년대 후반의 일본과 2000년대 중반의 미국은 거의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고, 거의 비슷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은 어떤 정책적 잘못을 저질렀을까? 핵심은 소비자물가가 안정되어 있다는 이유로 자산가격의 급등 상황을 방치했다는 것이다. 두 나라 정책 당국은 모두 부동산과 주식 가격이 이상과열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기준금리 인상 등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과 일본의 중앙은행은 금리란 소비자물가가 너무 높을 대 안정화시키기 위해 인상하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에 매우 충실했다. “물가가 매우 안정적인데 자산가격만을 잡기 위해서 금리를 인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과감하게 내놓지 못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주류경제학 이론에 충실했지만, 현실은 경제학 이론보다 더욱 변화무쌍했고 무자비했다.

주식이나 부동산 등 자산 시장의 변동은 투자자들의 손실이나 이익으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 경제 전체를 뒤흔드는 중요한 변수로 떠 오르기도 한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필요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상황을 방치한다면, 우리 또한 1990년 일본과 2007~08년 미국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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